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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블로그 주인장 Choi PM 입니다. 본 블로그는 제가 정신줄 놓기 전에 제약 PM업무와 관련한 정보와 노하우를 기록해 보고자 만든 공간입니다. 블로그를 통해 제약업계의 여~러분과 좋은 인연되길 바랍니다.^^ flanaria@naver.com Since2007/10/14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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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 쉬움을 최고의 가치로 누구보다도 높은 기준을 가지고 최고의 성과를 이룬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

수많은 애플 마니아들에게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던 그가 췌장암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불과 56세의 나이에 숨진 스티브 잡스의 인생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영화같은 삶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불과 20대 초반의 나이에 실리콘 밸리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승승장구하다가 자신의 손으로 뽑은 직원에 의해 애플 사에서 쫓겨났는가 하면, 픽사를 설립하여 최고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키워냈고, 위기에 처한 애플에 돌아와 금세기 최고의 히트작이라 할만한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애플사를 최고의 IT 기업, 최고의 컨텐츠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애플 사는 자사의 홈페이지에 떠 있는 저 사진을 다운로드 받으면 t-hero라는 파일명으로 다운로드받도록 해두었습니다.
수많은 직원을 밤샘시키고, 해고하고, 독설을 퍼부으며 수많은 프로젝트를 뒤엎었던 그에게 애플이 영웅이라는 칭호로 그를 애도하고 있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요?

그의 방법이 비록 일반적이지 않았을지는 모르나 그의 가슴에 가득했던 혁신에 대한 열정과 최고의 가치를 탄생시키려는 예술가와도 같은 고집이 직원들의 마음에 전해진 게 아닐까요?

스탠포드대 졸업식에서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명언을 남겼던 스티브 잡스...

본인이 남긴 말 그대로 "배고픈채로, 우직하게" 한결같았던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머리숙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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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아이티 사태를 보면서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물론 비약이라고 하셔도 할말은 없습니다만 국내 정치가 안정화되고, 사회의 각 부분이 지금보다 더 선진화되어 제 기능을 발휘했다면 이렇게 큰 피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민들에게 진흙쿠키를 먹게 하는 국가가 과연 국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PM도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을 통해 MR들로부터 평가를 받게 되겠죠.

대자연 앞에서는 인간이 이렇게 하잘것 없는 존재라는 느낌...
국제적인 공조를 통해 대재난을 극복해가는 인류애와 국격에 맞는 지원은 얼마인가... 등등 많은 생각이 들게하는 아이티사태입니다. 아이티 구호성금 내야겠네요...




 
아이티의 진흙쿠키와 스티비 원더의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예병일   2010년 1월 21일 목요일
 
 
 
 
1957년 9월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발리에(‘파파 독’이라고도 함)는 의회를 해산했으며, 1964년 6월에는 종신대통령이 되어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1971년 그가 죽자 ‘베이비 독’이라 불리는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계승했다. 뒤발리에 가문의 30여 년에 걸친 독재기간에 아이티의 경제적 불균형, 정치적 탄압, 타락한 정치관행 등이 지속되면서, 1986년에 이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반정부 시위로 표출되었고 장 클로드는 축출되었다.

1990년 아이티 역사상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해방신학자이며 가톨릭 신부인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 Bertrand Aristide)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91년 2월 취임하였으나, 9월 세드라에 의한 군부 쿠데타로 국외로 축출당하였다. 군부 쿠데타 세력이 미국 주도의 대아이티 다국적군의 군사개입 위협에 굴복하여 1994년 10월 10일에 자진 사임하고 파나마로 망명함에 따라, 미국은 1994년 10월 군사개입을 통해 당시 미국에 망명중이던 아리스티드를 다시 복귀시켰다...
 
'아이티의 역사' 중에서 (두산백과사전)
 
 
아이티의 역사와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요즘입니다.
 
시작부터 비극적이었던 아이티. 제국주의의 시대에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 180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 흑인공화국으로 새출발을 했지만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외세의 침탈 속에 내분도 계속됐지요. 특히 1957년부터는 '파파독'과 '베이비독'으로 불렸던 뒤발리에 부자의 30년 독재정치가 이어졌고, 지금까지 정치는 여전히 혼미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는 아이티.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먹을 것이 없어 아이들이 먹는다는 '진흙 쿠키'였습니다. 진흙에 소금과 마가린 섞어 만든 진흙 쿠키. 소화가 잘 안되서 배가 오래 부르기 때문에 먹는다는 말에는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아이티 역사의 오랜 비극을 보며 무엇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불행에 빠뜨리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몇시간 전에 MTV를 통해 '아이티에 희망을(Hope For Haiti Now)'이라는 모금방송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조지 클루니가 기획한 이 자선공연에는 빌 클린턴, 무하마드 알리,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도 보였고, 줄리아 로버츠 등 많은 유명인들이 자리에 앉아 직접 기부자들의 성금전화를 받더군요.
 
아래에 자선공연에서 스티비 원더가 사이먼&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부르는 유튜브 영상을 삽입했습니다.
 
험한 세상... 그래도 '다리'가 많이 있다면 살만할 겁니다. 우리 경제노트 가족들이 이 '험한 세상'의 '따뜻한 다리들'이 되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와 경제노트도 항상 함께하겠습니다.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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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플로거] 비극이 만든 명품!!
2010-01-14

예전 살던 동네에 한여름에도 누더기 옷을 껴입고 몇 년은 묵은 듯한 피지 덩어리가 반들반들 윤기까지 났던 한 여인이 있었다. 골목길을 배회하다 길가에 핀 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를 친구들은 '쉬라'라고 불렀다. 본 기억도 없는 만화영화 '우주여왕 쉬라'의 이름을 따다 친구들끼리 그렇게 놀리듯 붙였던 별명이었다. 우리가 '쉬라,쉬라'라고 놀려도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길가에 핀 이름모를 꽃을 사랑스럽게 쓰다듬곤 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그녀에게 '꽃'이란 어떤 존재였을까.


비극의 시작
?1945년 9월, 무려 7년 가까이 유럽과 아시아를 휩쓸었던 '2차 세계 대전'은 6천만명의 희생자를 뒤로 하고 끝이 났다. 곳곳에서 이산 가족이 속출했으며 전쟁 고아들도 넘쳐났고, 집을 잃고 떠돌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에겐 그저 따사로운 햇살이 행복이었을 테고 길가에 핀 꽃이 유일한 아름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굳이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아도, 살다보면 운명의 장난으로 이를 깨닫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 순간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애써 여유를 갖고 보면 삶에 대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이 지니는 가치를 비로소 마음에 담게 된다.




크리스챤 디올은 1905년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지방에서 태어났다. 정원에 핀 꽃을 손질하고 음악을 들으며 풍성한 꽃잎을 새하얀 도화지에 그리는 것이 이 소년의 취미였다. 5살 때 그랑빌에서 파리로 이사했고 외교관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의 꿈은 건축설계와 미술이었다. 아마도 노르망디 그랑빌에서 태어난 유년 시절의 감수성이 그를 지배했던 탓인지도 모른다.


1931년,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어머니의 죽음을 뒤로 하고 생계를 위해 패션 디자이너 일을 시작했던 25살의 청년 '크리스챤 디올'. 그리고 형의 죽음. 그렇게 불행은 한꺼번에 그의 삶을 짓눌렀다. 먹고 살기 위해 패션 디자인 공부를 하고 생계를 유지했지만, 2차 세계대전은 또다시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여동생마저 잃게된 그에게 남겨진 것은 그저 '추억'뿐.


제 2차 세계 대전에 군인으로 참전하고 그 뒤 농장 일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던 디올은 전쟁이 끝난 후 지인의 도움을 받아 1946년 10월에 자신만의 옷 가게를 설립했다. 지독한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밤을 지새며 옷을 디자인했던 그에게 옷을 만든다는 것은 곧 과거를 추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망초를 사랑했던 어머니를 그리워하다가 물망초를 닮은 옷을 만들었고 자신의 여동생을 그리워하며 '미스 디오르'라는 향수를 만들었던 디올.


디올의 패션 세계는 이처럼 어머니와 여동생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1947년 2월. 생애 첫 패션쇼를 열었는데, 이 패션쇼는 유럽 전역은 물론 바다 건너 미국에까지 영향을 끼쳤고, 디올은 첫 패션쇼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거듭났다.




일명 '뉴 룩'이라고 불렸던 그의 옷은 여성의 우아함을 극대화한 디자인으로 평가받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디올의 어머니가 평소 좋아했던 꽃,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지닌 물망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뉴 룩'은 순전히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디자인했던 옷이다. 다소 과장된 곡선을 통해 여성의 몸이 지니는 실루엣을 그대로 표현했던 그의 옷은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내면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명품의 탄생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떠돌아 다녔으며 또한 전쟁 이전의 삶을 그리워했다. 전쟁 이전에 보고, 듣고, 느꼈던 평화로운 들판과 아름다운 꽃, 그리고 웃음소리. 사람들은 그렇게 '아름다움'을 추억하고 있었지만, 전쟁의 영향으로 옷감이 부족한데다 또한 급속하게 퍼져나갔던 우울증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치장하는 데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밀리터리 룩'이라 불리는 패션이 나왔던 시기도 이 즈음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전쟁 후 쓸모가 없게 된 군복을 수선해 치마나 코트로 만들어 입었고 또한 '천'이 부족해지자 치마의 길이도 무릎 아래 정도로 짧아졌다. 형형색색 빛나는 봄이 왔지만 여성들이 입던 옷은 그저 아래로 축 처진 '남색 치마'였다. 물론 입을 옷이 그것밖에 없었지만, 여성들은 그렇게 초라한 옷을 입고 옛 시절을 추억해야만 했다.




이처럼 삭막했던 시기에 발표된 디올의 '뉴 룩'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그저 마음 속으로 꾹 눌러야 했던 여성들에게 길가에 핀 아름다운 꽃이나 마찬가지였다. 꽃의 풍성함과 꽃잎의 곡선을 닮은 그 옷은 장마가 끝난 뒤에 햇살이 주는 싱그러움 그 자체였고, 또한 여성들은 더이상 길가에 핀 꽃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었다. '뉴 룩'을 입는 순간 여성 자신들이 바로 한송이 '꽃'으로 부활했기 때문이다.

길거리 수많은 여성들이 '뉴 룩'을 입었고, 디올은 그런 여성들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환생한 듯한 착각을 하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충분히 알 터. 그리워하는 이와 닮은 사람을 마주쳤을 때의 그 숨막힐 듯한 마음. 디올은 그렇게 '뉴 룩'을 통해 어머니를 추억했다. 어머니를 그토록 그리워했던 디올은 그 후로 수없이 많은 디자인을 통해 어머니를 형상화했고, 옷을 통해 전쟁 이전의 아름다운 삶을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1947년 '뉴 룩' 이후, 디올은 튤립 꽃을 형상화한 '튤립 라인'과 현대 여성 의복의 기본이 된 'A라인', 'H라인', 'Y라인' 등의 여성 의복 실루엣을 창조했는데, 이 모든 디자인의 바탕은 전쟁 이전의 삶이 주는 아름다움과 또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오늘날 세계적인 명품으로 올라선 '크리스챤 디올'은 가족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비극과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전후하며 탄생했다. 만약 그런 불행이 없었다면 그의 옷이 그토록 여성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을까? 또한 그런 비극이 아니었다면 디올은 패션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떨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가치'
사람들은 패션을 말초적인 감성에 기댄 것이라며 폄하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명품 브랜드의 가치를 그 비싼 가격만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디올'의 탄생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 값이 비싸다고 해서 모두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의 영혼과 예술적 감수성,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명품'이라고 한다.

물론 오늘날 수많은 여성들이 명품의 가치를 그저 '돈'으로만 환산하고 또한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디올의 이런 역사를 알게 된다면 과연 그 옷으로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까? 디자이너 '디올'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만든 자신의 옷이 그런 수단으로 사용되는 걸 결코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외롭고 쓸쓸한 여인이 길가에 핀 예쁜 꽃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담아낸 '디올'. 그리고 그 옷을 통해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자 했던 여성들. 명품 '디올'은 이렇게 탄생했다. 아름다움이 곧 슬픔을 이겨내는 힘이라는,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채.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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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블로그 주인장 행복공주신랑입니다.
파란만장했던 2009년이 저물어 갑니다.
송년회 일정으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들 계시겠지요?^^
정신없는 망년회가 아닌 희망찬 송년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촐한 자리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부담없이 인연의 소중함을 믿는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명함만 두둑하게 챙겨 오시면 되구요.

여성분은 초초초 절대 우대합니다.-_+
미모 상관없음... 연령 상관없음... 치마 착용여부 상관없음...

참석을 희망하시는 분은 댓글로 참석 의사를 밝혀주시면 주인장이 적정 시점에 예약하겠습니다.
그럼 댓글 많이많이 달아주세요.^^
감사합니다.

1. 일시 : 2009년 12월 14일(월)
2. 장소 : 지하철 2호선 선릉역 7번 출구 부근 "지글"(02-556-7892)
3. 메뉴 : 소고기(수입^^;)
4. 얼굴 모르는 사람들끼리 헤맬 상황이 뻔하므로, 제 맘대로 "최혜인"이라는 이름으로 예약하겠습니다. 끝.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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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렛 패커드 사의 전 회장이었던 칼리 피오리나는 드라마틱한 인생의 주인공입니다.
1954년 생으로 25세에 AT&T 네트워크사의 영업사원으로 입사해서 "놀랍도록 재기발랄한 두뇌"라는 평가와 함께 35세에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됩니다. 40세에는 북미담당 영업이사로 승진했고, 1996년에는 AT&T 네트워크사를 루슨트테크놀러지 사로 분사시키면서 진행된 기업공개에서 당대 최고액수인 30억 달러의 수입을 올린 후 글로벌 서비스 부문 책임자로 일하면서 최고의 경영능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당시 루슨트테크놀러지 사는 년간 매출 200억 달러를 기록하였으며 주가는 무려 12배가 증가하였습니다.
이후 1999년에는 HP사의 CEO로 영입되어 2001년 컴팩 인수를 주도하고, HP-컴팩 통합법인의 최초 CEO가 되었지만, 이후 HP사의 프린터 부문 분사에 관한 휴렛가문과의 알력으로 주가하락이 이어지면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사실상 축출됩니다.
가장 성공한 여성 기업인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지만, 자신을 가장 성공하게 해주었던 기업으로부터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 셈이지요.

뉴욕타임즈는 당시 이런 기사를 실었습니다.
여성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남성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겨버리는 신데렐라형 여성과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해가는 칼리피오리나형 여성이 있다고 말입니다
.

최근에는 강연과 저작활동을 하면서 여전히 철의 여인 이미지를 이어가고 있는데요.
참 부럽습니다.
네트워크 분야에서야 흔한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업계에서 10년만에 임원이 되다니...ㅡㅡ;
저도 곧 임원이... 쿨럭....
아래 글은 칼리피오리나가 스스로에게 매일 질문했다는 다섯 가지 질문입니다.
제 자신을 참 부끄럽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대학 졸업 후 십년 넘는 월급쟁이 생활을 통해 배우처럼 연기를 잘 하게 되었고, 선택을 당하고 있고, 나의 머리보다는 성질을 자극하는 장소에 있고,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급급한 채로 아무것도 남길 게 없네요.
쩝...ㅡㅡ;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다섯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배우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참되게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도 선택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선택하기를 멈추었는가?
나는 지금 나의 머리를 자극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장소에 있는가?
나는 과거에 얽매여 있는가, 아니면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가?
나는 이 지구상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 칼리 피오리나 (휴렛 패커드 전 회장), ‘천재를 뛰어넘는 연습벌레들’에서 인용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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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블로그 주인장 행복공주신랑입니다.
소주 한잔 나누며 두런두런 이야기하실 분들 초대합니다.
아무래도 강남역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전화해댈 상황이 눈에 선해서
오실 분들께 여쭙지도 않고 맘대로 정해버렸습니다.
역시 메뉴도 돈 낼 사람 맘대로 정했습니다.ㅡㅡv
그냥 맘 편히 명함이나 몇장 챙겨오시면 될 듯 합니다.^^

일시 : 2009년 6월 25일 저녁 7시
장소 : 딘타이펑코리아, 강남점(02-569-2778)
예약자명 : 최혜인(8개월된 제 여식의 이름입니다. 보안유지를 위해서...-_+)
찾아오시는 길 : 2호선 강남역 5번 출구 30m 직진후 TGI.FRIDAY"S 골목으로 우회전
                      도보로 약 7~8분 거리라고 합니다.

홈페이지 참조 : http://www.dintaifung.co.kr/shop/shop_kangnam.aspx#1

댓글로 참석 여부 알려주세요.^^
예약 확인을 해야 하는 관계로...ㅋㅋ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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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꿈 하나로
온 국민을 감동시켰던 사람...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온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던 사람...
자기 스스로 4대 권력기관의 고삐를 놓아버리고,
스스로 권위와 권력의 단에서 내려와 서민의 옆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
반대만 하지 말고 대화를 해보자며 수십년된 정적과도 이야기하길 원했던 사람...
기득권층의 온갖 해꼬지에도 올곧게 한 길을 갔던 사람...
그의 공과를 따지기에 앞서 우리나라는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사망으로 이르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역사가 밝혀주겠지요.
권좌에 올라 남북관계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가며 재벌과 가진 자들의 편에 선 대통령을 보며
"한 국민은 절대로 자기 수준 이상의 국가 지도자를 가질 수 없다."는 정치 격언이 새삼 떠오릅니다.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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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리별 골프 클럽 선택]
구분 Wood Util&Hybrid Iron 비고
230 Y D  (10도) . . .
220 Y 3W(15도) . . .
210 Y 4W(17도) . . .
200 Y 5W(19도) 2U(15도) . .
190 Y 7W(21도) 3U(18도) 3I (21도) .
180 Y 9W(23도) 4U(21도) 4I (23도) .
170 Y 11W(26도) 5U(24도) 5I (26도) .
160 Y . 6U(27도) 6I (29도) .
150 Y . . 7I (32도) .
135 Y . . 8I (36도) .
120 Y . . 9I (40도) .
110 Y . . P (45도) .
100 Y . . 48도 AW .
95 Y . . 50도 AW .
90 Y . . 52도 AW .
85 Y . . 54도 SW .
80 Y . . 56도 SW .
75 Y . . 58/60 .
70 Y . . 62도 LW .
65 Y . . 64도 LW .

'Private > Golf' 카테고리의 다른 글

PM - 웨지를 이용한 어프로치 칩샷 팁  (0) 2008.12.28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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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지를 이용한 어프로치 칩샷의 작은 팁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56도 웨지는 칩샷에서 캐리(공중으로 날아가는 거리)와 런(땅에 떨어져서 굴러가는 거리)의 비율이
보통 1대1입니다.

52도 웨지는 캐리가 1m이면 런이 2m,

피칭 웨지는 캐리가 1m이면 런이 3m정도입니다.

아이언으로 러닝 어프로치샷을 하면 '12-아이언 번호'를 하면 캐리와 런의 비율이 대충 나옵니다.

7번 아이언으로 어프로치를 하면 1m대 '12-7(번 아이언)=5m' 정도가 되겠지요.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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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열며...

Private / 2007. 10. 30. 19:49

1. 한때는 글을 쓰는 것에 인생을 걸어보려 한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규정하고, 평가절하하는 치기어린 독설을 나의 문재(文才)라고 착각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글을 쓴다는 것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정리되지 않은 가치관과 얕은 식견이 글로 드러나 누군가에게 읽혀지고, 그것이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 두렵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중인 것 같다.

2. 신문에서, 인터넷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 우리는 문자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그 속에서 실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는 글을 발견하기도 하고, 감탄이 절로 나는 글을 만나기도 한다.

이렇게 범람하는 문자의 홍수 속에서 과연 내가 한줄을 보태야만 할 것인가?
나는 아직도 이 질문에 자신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3. 하지만 내게 있어 글, 글쓰기란...
누구나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법한, 이루지 못한 꿈과 같은 아련한 것이다.

나이 많은 할머니가 버스에서 빈자리에 앉는 것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것처럼...
남들의 시선이 나의 실수를 적당히 봐줄 수 있을만큼 내가 나이들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때쯤...
그때쯤에는 꼭 글을 쓰고 싶다.

4. 이건 어디까지나 연습이다...^^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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