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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블로그 주인장 Choi PM 입니다. 본 블로그는 제가 정신줄 놓기 전에 제약 PM업무와 관련한 정보와 노하우를 기록해 보고자 만든 공간입니다. 블로그를 통해 제약업계의 여~러분과 좋은 인연되길 바랍니다.^^ flanaria@naver.com Since2007/10/14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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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자본이라는 게 있답니다.
1. 유대계 자본
2. 중동의 오일 머니
3. 화교 자본

이 3대 자본 중에서 누가 돈이 더 많다, 적다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테구요, 이 3대 자본의 영향력만 놓고 본다면 유대계 자본이 가장 크지 않나 생각합니다. 음모론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유대계 자본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정치, 경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지요.

어쨌든 하버드 대학생의 30%, 아이비 리그 교수의 30%, 노벨상 수상자의 30%, 세계 억만장자의 30%가 유대인이라고 하던데 참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세계의 부자들 중에 록펠러와 로스차일드 가문, 조지 소로스 등은 모두 유대계 자본이죠.

저는 세계적인 부자는 필요없구요.
그냥 타워팰리스 정도 되는 집이나 한 열 채 있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__)






존 D. 록펠러와 록펠러 주니어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들  
 
 
 
 예병일   2010년 3월 9일 화요일
 
 
 
대학에서 록펠러 주니어는 절약가로 유명했다. 친구들이 저마다 관련 일화를 하나씩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가 마주 달라붙은 2센트짜리 우표 두 장을 물에 적셔 떼어낸 일이나, 바지를 직접 다려 입고 손수 단추를 달았다는 것, 그릇 닦는 행주를 꿰매어 수선했던 일 등을 기억했다.
 
또한, 친구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한 습관이었지만 그는 아버지를 본받아 조그만 수첩에 지출 내용을 일일히 기록했다. 데이트를 위해 꽃다발을 살 때도, 교회에 헌금을 낼 때도, 가난한 사람에게 연필 한 자루를 사줄 때도 모든 지출을 센트 단위까지 꼼꼼이 적어두었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원하는 만큼 돈을 받지만, 대신 동전 한 닢까지 정확한 사용처를 대야한다고 하더군요."
또 한 친구는 이렇게 회상했다. "특히 프로비던스에 사는 여학생들 사이에 굉장한 농담거리였지요. 존 D. 록펠러 주니어에게 음료수 한 잔을 사달라고 해서 얻어먹고는 앉은 자리에서 수첩에 지출 내역을 써넣게 했다며 웃어대곤 했습니다." (30p)
 
 
론 처노 지음, 안진환.박아람 옮김 '부의 제국 록펠러 2 - 그 신화와 경멸의 두 얼굴' 중에서 (21세기북스(북이십일))
 
존 데이비슨 록펠러. 1839년에 태어나 1937년 숨진 미국의 '대부호'입니다. 그의 재산이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빌 게이츠의 3배가 넘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니 당시 그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부자였습니다.
 
록펠러는 저자가 책의 부제를 '그 신화와 경멸의 두 얼굴'이라고 정했을 정도로 철저히 양면적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지요. 미국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무자비하고 탐욕스러운 자본가의 얼굴과 의학연구 등에 막대한 기부를 한 자선사업가의 얼굴 두가지가 그것입니다. '악마'와 '성인'이라는 말을 동시에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전자의 시각으로 본 평가는 버트런드 러셀의 다음 말이 대표적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를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둘 있는데, 바로 록펠러와 비스마르크다. 한 명은 경제에서, 또 한 명은 정치에서, 개개인의 경쟁을 통한 보편적 행복이라는 자유주의자의 꿈을 부정해버렸다. 그리고 그 꿈을 독점과 조합국가로 대체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렇게 변화해나가도록 주도한 인물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그 부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든지 간에 그 부를 쌓으며 저지른 악행을 보상할 수는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후자의 시각은 윈스턴 처칠의 다음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가 존 D. 록펠러에게 최후의 평결을 내린다면, 그것은 마땅히 그가 의학 연구에 기부한 행위가 인류의 진보에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것이어야 한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이 교황과 군주들의 후원에 힘입었던 만큼이나, 오늘날 과학은 관대하고 통찰력 있는 부자들에 빚지고 있다. 이러한 부자들 가운데 존 D. 록펠러는 가장 훌륭한 전형이다."
 
이런 논란은 잠시 접어두지요. 록펠러 같은 오래전의 인물에 대한 이런 평전에서는 몰랐던 일화들을 읽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철저히 청교도적인 인물이었던 모양입니다.
"록펠러는 마치 의식을 치르듯 간소한 생활을 고수하고 엄격하게 욕구를 억제했다."
"록펠러는 백 살까지 살기 위해 생활방식을 주의 깊에 관리했고, 초 단위까지 똑같은 규칙적인 일정을 매일 충실히 따르는 것을 대단히 중요시했다."실제로 그는 담배나 술을 멀리했고 사교도 멀리했으며 백 살 가까이 살았습니다.
 
록펠러는 또 '지독한 구두쇠'였던 모양입니다. 저자는 그가 자선사업에서는 매우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구두쇠였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다른 갑부들이 개인지출을 감독하는 직원을 별도로 두었지만, 록펠러는 지출의 세부사항까지 스스로 관리했습니다. 여러 영지의 회계장부는 모두 그가 있는 브로드웨이 26번지로 보내졌고, 마지막 1달러까지 철저히 감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록펠러는 각 저택의 직원들에게 들어가는 1인당 음식비용까지 확인했다고 합니다. 1인당 비용이 포칸티코는 7.80달러, 포레스트힐은 6.62달러인데 비해 웨스트 54번가 4번지에서는 훨씬 높은 13.35달러가 나오자 그곳의 관리인을 호되게 꾸짖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들 록펠러 주니어도 비슷했나봅니다. 그도 철저한 금용주의자였지요. 그가 아버지를 본받아 지출 내용을 조그마한 수첩에 일일이 기록했다는 일화가 흥미롭습니다. 예전부터 저도 아이에게 용돈을 줄 때 꼭 지출내역을 기록한 것을 확인하고 주고 있습니다. 기록을 하지 않은 주에는 용돈을 주지 않고 있지요. 기록을 해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 옛날의 '재벌 2세'인 록펠러 주니어도 비슷한 수첩을 가지고 있었다니 흥미로왔습니다.
 
록펠러는 언론이 자신의 부친을 비하하는 말을 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고 하지요. 그의 부친인 윌리엄 에이버리 록펠러는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만병통치약'을 팔았던 사람이었습니다. 20세기초 미국의 언론들은 그의 부친 이야기를 기사화하면서 그를 19세기 미국의 개척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빼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을 홀리고 비행을 일삼는 떠돌이 행상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그런 '닥터 록펠러'(떠돌이 약장사)의 아들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기부 재단이자 의학, 의료교육, 공공보건에서 최고의 후원단체를 만들었고, 그런 떠돌이 약상사들이 번성했던 19세기 의학의 원시적 세계에 치명타를 날렸다는 저자의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그가 평생 기부한 5억3000만 달러 가운데 4억5000만 달러가 의료사업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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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탁월한 수익을 얻는 방법 
다른 사람들과 같은 종목을 같은 시기에 투자한다면,
그 사람들과 같은 결과 밖에 얻지 못한다.
남들과 다르게 투자해야만 더 나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모두가 팔려고 할 때 사고, 사려고 할 때 팔려면
대단한 용기와 인내가 요구되지만
이를 통해 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 존 탬플턴, 프랭클린 템플턴 인베스트먼트 설립자 
 
 
 
역발상 마케팅으로 유명한 유준상 교수는
“상식은 독이나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이며,
이러한 상식에 대해서는 해독제나 바이러스 예방백신이 필요하다.
재산가들 중에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 고 말합니다.

고정관념, 남을 따라 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부정적 산출물을 낳습니다.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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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병일의 경제노트, 2008.9.30)

매일 아침, 앤디는 출근 시간보다 일찍 나와 사무실을 청소했다. 그러면서 틈틈히 독학으로 모스 부호를 공부했다. 사환들은 통신망이 가동 중일 때는 장비를 일절 건드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전보 교환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사이 전보 하나가 들어왔다. 자신감에 넘쳐 있던 앤드류는 그 전보를 받고 싶어 좀이 쑤셨다. 자칫하면 직장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전보를 받았다...

사장은 카네기를 해고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하면서 교환원들이 쉬는 시간에 카네기에게 전보 업무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존 가트너의 '조증' 중에서 (살림비즈, 195p)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업무 범위를 뛰어넘어 무언가 특별한 것을 시도해야 한다."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가 한 말입니다.
그는 US스틸사의 모태인 카네기철강회사를 설립했고, 은퇴 이후에는 교육과 문화사업에 전념했습니다. 철강회사를 경영할 때는 '냉혹한 자본가'였지만, 은퇴 이후에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죽음이다"라는 글을 썼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 되었지요.
그는 사람이란 일생을 2기로 나누어, 전기에서는 부를 축적하고 후기에서는 그 부를 사회복지를 위해 써야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카네기멜론대인 카네기공과대학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카네기는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도 항상 '도전'하려 노력했습니다. 미국으로 이주해온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피츠버그 전보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열세 살의 소년 카네기. 하지만 항상 일찍 사무실에 나와 청소를 했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사무실이 비었을 때 해고위험을 무릅쓰고 '사환'의 업무를 넘어서 자신이 독학한 '전신원'의 업무에 도전했습니다. 그 결과는 사장의 칭찬과 정식 전신원으로의 승진이었지요.

비슷한 일화는 또 있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전신원으로 스카우트된 카네기는 그곳에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출근 직후 열차가 탈선해 모든 시스템이 마비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스카우트했던 지역 책임자는 연락이 되지 않았지요.
카네기는 해고와 감옥행을 각오하고 책임자 명의로 철도노선 변경 등을 전보로 지시하며 사고를 수습했습니다. 사태가 종료되었을 때 책임자가 나타났고, 그는 매우 기뻐하며 전신원이었던 카네기에게 모든 철도 노선을 조정하는 업무를 맡겼습니다.
카네기는 독학으로 입사 1년도 안되어 복잡한 철도 운영 방식을 완벽하게 익혀놓았던 것이었습니다.

항상 공부하며 실력을 쌓고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뛰어넘는 시도를 했던 앤드류 카네기. 19세기의 이 카네기의 마인드는 21세기인 지금도 유효합니다.

Posted by Choi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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